- ▲ 이동운 기자 dulana@chosun.com
"콜레스테롤 낮춘다" 방송 나간 후 들썩
우유업체 "실제론 달라" 오메가3는 들기름으로 충분
"영양 균형 맞추자는프로그램 취지 좋지만다양한 임상사례 보였어야"
2008년 봄, KBS의 한 다큐프로그램이 건강식품 고구마를 소개했다. 대학 연구팀이 고혈압 쥐에게 '자색 고구마' 추출물을 투여하자 6시간 만에 수축기 혈압이 170mmHg 전후에서 130대로 떨어졌고, 고혈압을 앓는 50~60대 남성 9명에게 아침, 저녁으로 자색 고구마즙 100㎖를 마시게 했더니 한 달 만에 8명의 혈압이 떨어졌다. 자색 고구마는 국립식량과학원 바이오에너지작물센터가 1993년, 2001년에 개발한 품종이다.방송 직후, 자색 고구마의 인기가 치솟았다. 국립식량과학원 관계자는 "업계에선 이미 알려진,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방송이 나가자 전화가 불통 될 정도로 문의가 빗발쳤다"고 했다. 그런데 가을이 되자 자색 고구마가 안 팔렸다. 반짝인기였다.
건강 다큐프로그램에서 특정 음식이나 약품의 효과를 증명할 때에는 이런 방법이 흔히 동원된다. 대학 연구팀의 임상 시험, 학술지의 논문 인용, 해외 사례…. 과학과 실제 사례로 무장한 정보에 시청자는 빠르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풀 먹인 계란' 찾는 사람 많다는데…
SBS가 10일과 17일에 'SBS 스페셜-옥수수의 습격'을 방송하자 이번에는 '풀 먹여 키운' 고기와 계란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옥수수의 습격'은 곡물사료(주로 옥수수)를 먹고 자란 소나 돼지, 닭에서 나온 고기와 우유, 달걀 등이 건강을 위협한다고 지적하고, 대안으로 풀을 먹여 키운 축산 식품의 효험을 소개한 다큐멘터리다.
방송 초반에는 '풀 먹여 키운 소의 우유로 만든 버터를 끼니마다 3스푼씩 듬뿍 먹고 4년 만에 60㎏을 빼고, 고혈압까지 낮아졌다'는 미국인 지미 무어(42)씨의 사례가, 마지막에는 강원대 동물생명공학과 박병성 교수 연구팀이 5개월에 걸쳐 임상 시험한 결과가 등장했다. 성인 12명이 수입산 쇠고기를 먹고 난 다음 날에는 몸에 나쁜 LDL 콜레스테롤 수치가 올라갔는데, 오메가3 성분이 많은 아마인·들깨를 8% 배합한 사료를 먹여 키운 이른바 '오메가3 한우'를 먹고 난 다음 날에는 수치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밖에 풀 먹인 소의 생우유를 마시고 병이 나았다는 사람들, 프랑스 학자의 사례, 부산대 연구팀의 쥐 실험 등이 소개됐다.
방송 직후 주부들의 인터넷 카페에서는 이 프로그램에 나온 우유, 계란, 쇠고기 정보를 주고받는 움직임이 분주했다. 방송을 제대로 보지 않고 "앞으로 옥수수 먹지 말아야겠다"는 네티즌도 있었다.
대형할인매장 홈플러스는 일반 계란보다 20% 정도 비싼 목초란(15알·5200원)을 지난 10일부터 25일까지 지난달 기준보다 약 50% 더 팔았다. 강원대 박병성 교수의 임상 시험을 지원한 늘푸름 홍천한우 클러스터 사업단은 11월부터 서울의 백화점에서 오메가3 한우를 판매하기로 했다.
풀만 먹고 자란 젖소의 생우유를 마신다고?
유기농 우유목장을 20년째 운영하는 A(43)씨는 "방송이 끝나고 3~4일간 다른 업무가 불가능할 정도로 문의와 주문이 밀려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주문이 늘어 좋겠다"는 말에 A씨는 오히려 불만을 털어놓는다. 국내 실정을 모르고 보도했다는 것이다.
"방송에 나오는 '생우유(raw milk)'는 살균처리를 하지 않은 '원유'를 뜻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각종 감염 우려로 유통 자체가 안 된다. 또 방송을 보고 '당신네 젖소는 풀만 먹이냐'고 묻는 소비자가 많은데 설명하느라 진땀 뺐다. '고능력 젖소(우유를 많이 생산할 수 있도록 개량된 품종)'는 풀만 먹여서는 더운 여름에 픽픽 쓰러질 수 있어서 곡물을 꼭 먹여야 한다. 유기농 업체는 풀, 곡물의 이상적 비율로 알려진 7:3 정도로 먹인다."
충북대 축산학과 송만근 교수는 "고능력 젖소는 어떤 식으로든 곡물로 에너지를 보충해야 해서 풀만 먹일 수가 없다"며 "풀만 먹은 젖소의 원유로 '질병치료 효과'를 봤다는 주장을 과학적 데이터 없이 내보내면 국내 우유업체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국축산과학원의 한 관계자는 이런 말도 했다. "버터로 살을 뺐다는 '지미 무어'는 예전에 황제다이어트의 성공사례로 여러 번 나왔던 사람이다." 실제로 앳킨스 다이어트(탄수화물을 배제하고 고단백식품으로 살을 빼는 '황제다이어트') 홈페이지에는 지미 무어의 성공담이 올라와 있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지미 무어는 6년 전에 이미 이 다이어트 요법으로 81㎏ 정도를 뺀 상태였다. 방송에선 4년 만에 60㎏을 뺐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다시 체중이 불었다가 살을 뺀 것인지, 황제다이어트의 일환으로 오메가3 버터를 이용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프로그램을 연출한 PD는 "지미 무어가 황제다이어트를 했다는 사실은 몰랐다"고 했다.
임상 시험의 설계에 대한 지적도 있다. 프로그램을 시청한 서울대 동물생명공학과 최윤재 교수는 "조사료(목초·건초 등) 급여를 높여 축산 식품의 부족한 오메가3 비율을 높여야 한다는 프로그램 기획은 참 좋다"면서도 "방송 분량만 살폈을 땐 임상 시험 설계가 단순해서 신뢰하기 어렵고, 소비자나 축산농가가 불안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최 교수는 "방송만 보면 마치 옥수수 사료로 키운 한우는 먹으면 안 될 것 같고, 풀만 먹인다고 알려진 뉴질랜드산 쇠고기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고 했다. 건국대 동물생명공학과 한상기 교수는 "특정한 몇몇 표본이 아니라 무작위에 충분한 양의 표본으로 실험해야 신뢰도가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임상 시험을 진행했던 박병성 교수의 의견은 어떨까? 26일 강원대에서 만난 박 교수는 "실험이 단순하다는 평이 있지만, 다른 요인을 통제하지 않고서도 3차례 반복했을 때 똑같은 결과가 나와 충분히 의미 있다"고 했다.
박 교수는 또 이런 설명도 했다. "처음에는 일반 한우와 오메가3 한우를 비교하려 했는데, 제작진이 홍천에서 미국산 초이스(한우 2등급 수준)급 쇠고기를 사 와서 비교해보자고 했다. 수입산을 실험하니 오메가3 한우와 콜레스테롤 수치 차이가 매우 컸던 반면, 일반 한우와 오메가3 한우 사이에는 차이가 있긴 했으나 두드러지지는 않아 방송에서 빠졌다." 일반 한우와 오메가3 한우의 비교실험 결과 일반 한우를 먹은 대상자의 55%는 LDL 콜레스테롤이 0.1% 올라갔고, 45%는 오히려 15% 내려갔다.〈표 참조〉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방송에 나간 오메가3 한우와 수입산 쇠고기의 임상 시험만으로는 옥수수 사료와 콜레스테롤 수치의 연관성을 규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서울대 최윤재 교수는 "그 연관성을 확실히 규명하려면 미국산 일반 쇠고기를 실험하면서, 동시에 풀만 먹인 뉴질랜드산 쇠고기 실험도 함께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오메가3는 굳이 쇠고기에서 찾기보단 평소 들기름, 깻잎 등 야채를 통해 충분히 섭취하는 것이 간편하고 저렴한 방법"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평소 고기 위주 식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도 쇠고기에서 오메가3를 섭취할 수 있다면 LDL 콜레스테롤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의미 있는 연구"라고 설명했다. 소가 옥수수만을 먹게 되면서 축산 식품에 옥수수에 많은 오메가6(살을 찌우고 과잉 섭취했을 경우 고혈압과 비만을 유발하는 필수 지방산)가 집중됐기 때문에 오메가3(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고 세포를 보호하는 필수 지방산) 비율을 높이는 연구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홍천한우 클러스터 사업단은 "오메가3 한우는 아직까지 가격을 책정하지는 않았지만 일반 한우보다는 생산비가 더 들었기 때문에 가격 수준이 조금 올라갈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