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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가지가지뉴스] '한국형 ○○○' 추진했다가 실패한 정책들

까만마구 2016. 3. 18. 04:09

[경향신문] 미래창조과학부가 인공지능 사업을 육성하기 위해 올해 예산 300억원을 들여 ‘지능정보기술연구소’를 설립하고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알파고와 이세돌 9단과의 첫 대국이 있던 9일 “인공지능 관련 한국의 기술 수준, 선진국과의 격차, 필요한 제도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정부의 갑작스런 관심에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인공지능 분야에 대한 투자는 필요하지만 최근 분위기에 편승해 ‘한국형 알파고’, ‘K-알파고’를 만들자는 정도의 일시적 ‘냄비 정책’ 아니냐는 거죠.

카이스트 학부·대학원 학생들은 “기존 연구 지원금 줄여 ‘K-알파고’ 만들 생각 말고 진행 중인 연구들을 기다려달라”, “단기 성과주의적 지원으로는 안된다”는 의견을 내놨습니다. 정부의 ‘한국형 ○○○’ 사업이 이슈가 될 때만 ‘반짝’ 나왔다가 예산만 사용하고 폐기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죠. 끓다가 만 ‘한국형 ○○○’ 사업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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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카길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초 농림수산부(현 농림축산식품부)는 ‘한국판 카길’ 사업을 벌였습니다. 카길은 이른바 ‘ABCD’(ADM,벙기,카길.LDC)로 불리는 세계 4대 곡물유통기업이죠.

안정적인 곡물 확보를 위해 농수산물유통공사(aT·현 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미국에 자회사를 세워 곡물을 조달한다는 계획이었죠. 식량안보에 대한 장기비전 없이 국내 농업기반은 없애고 곡물수입회사만 키우려한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2011년 4월 농수산물유통공사는 삼성물산, STX, 한진과 함께 미국 시카고에 ‘aT그레인’이란 곡물회사를 세웠습니다. 곡물 산지에 엘리베이터(거대한 곡물창고)를 확보해 첫 해부터 콩 5만t, 옥수수 5만t, 시행 5년차인 2015년에는 연간 곡물 215만t을 확보해 국내 들여오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aT그레인은 미국에서 곡물 유통망도 확보하지 못하고 2014년 청산됐습니다. aT그레인이 들여온 곡물은 콩 1만1000t이 전부입니다.

■한국형 리눅스 ‘부요(BOOYO)’

2004년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영향력을 줄이고 공개 소프트웨어 기반의 안정적인 프로그램 개발을 지원하겠다는 취지로 ‘한국형 리눅스’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됐습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한국형 리눅스 ‘부요(BOOYO)’를 개발했죠.

당초에는 학교,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기관 중심으로 부요 보급을 늘리고, 핵심기술도 국제커뮤니티에 공개해 전세계 리눅스 커뮤니티에 공헌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대로 된 리눅스라면 소스는 당연히 공개하는게 맞습니다.

이후 부요 리눅스는 추가 업데이트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지금은 다운로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리눅스 이용자 중 부요를 사용하는 이들도 전무합니다.

사실 이런 일은 부요 리눅스를 만들기 10여년 전에도 벌어졌습니다. 1991년 정부 주도로 한국컴퓨터연구조합이 국산 운영체제(OS)인 K도스를 개발했습니다. 모든 컴퓨터 명령어를 한글로 처리해 ‘컴맹’을 줄이자는 취지였죠. COPY 명령어 대신에 ‘복사’, DEL 명령어 대신 ‘지우기’ 를 입력합니다.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운영체제 시장 분석없이 개발에 들어가면서 실패했습니다.

민간컴퓨터 업체들이 합류해 1991년 12억원의 개발비를 들여 K도스 3.3버전을 만들었지만 한 개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1993년에는 5.0버전을 만들었지만 컴퓨터 제조업체들이 MS도스를 컴퓨터에 설치, 컴퓨터와 함께 판매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K도스는 또다시 보급에 실패합니다.

한국형 ‘안드로이드’

5년 전인 2011년 지식경제부는 “구글의 안드로이드에 대항할 수 있는 한국형 모바일 운영체계를 개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애플의 iOS와 구글의 안드로이드는 전 세계 몇 십억명이 이용하지만 삼성 갤럭시 시리즈의 OS ‘바다’는 이용하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한데다, 나중에 구글이 스마트폰 제조 사업에도 뛰어들 경우를 고려하면 안드로이드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는 이유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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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업체가 시장상황을 판단해 OS 개발에 나서는 게 아니라, 정부가 나서 LG와 삼성을 위한 OS 개발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발상. 여전히 공무원들의 생각은 20세기에 머물러 있나봅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추진되지 않았습니다.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를 본따 만든 정부 주도형 대규모 할인행사. 소비심리를 회복하고 국내 경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지난 10월1~14일 2주간 실시됐습니다. 백화점 및 대형마트 등에선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매출이 약 7194억원(20.7%) 증가했다고 밝혔고 고무된 정부는 블랙프라이데이를 매년 정례화하겠다고 밝혔죠.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인 코리아 그랜드세일을 맞아 10월 1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을 찾은 시민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김정근기자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인 코리아 그랜드세일을 맞아 10월 1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을 찾은 시민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김정근기자

사실상 연말 할인행사가 블랙프라이데이 기간으로 당겨진 경우도 있었고, 정가보다 더 높은 가격을 ‘할인가’로 판매한 경우도 생겼습니다. 일부 백화점과 마트에서는 할인 부담을 중소 납품업체에 전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연말 정부가 막판 단기적으로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보니 무리한 정책이 나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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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의도대로 소비는 더 늘었을지 몰라도, 소득이 늘지 않는 상황에서 블랙프라이데이 행사는 단순한 소비 끌어당겨쓰기에 그쳤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