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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Were soldiers

까만마구 2013. 1. 25. 18:18


We Were soldiers


10년전 영화다. 베트남 전쟁영화들 중 그렇고 그런 특별한것도 없으면서도 특별한 영화. 


얼마전 호치민 평전을 읽은 뒤로는 베트남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다. 복잡한 정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지만. 우리가 6.25와 일제 식민지 기간이 엄연한 현실이듯이 베트남 또한 한국군이 참여한 전쟁이 현실이 된다. 일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이긴자(베트남) 쪽에서 문제를 강하게 제기 하지 않고. 그 당시 참전한 한국 군인들이 그 지역에서 사과 하고 그네들을 도와 줄 수 있는 민간 지원이 이루어 지면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지는 것을 현장에서 보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 좌익, 혹은 빨갱이. 요즘은 종북주의자를 이야기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묵묵히 그네들의 과거의 삶의 흔적을 되돌아 보면서, 그 당시 일방적인 주장에 의한 서로의 충돌을 아쉬워 하고 있다. 


우연히 철지난 영화를 다운 받아 봤지만 익숙한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작전에 참가하는 부대의 마크. 7기병여단 마크와 미 2사단의 인디안해드. 세계 최강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는 미 보병 2사단의 휘장. 내가 근무 했던 부대 마크다. 


외국 회사에 근무 할때 이력서에 반드시 표시하는 것이  "2nd, 702 M.S.B H& D  U.S ARMY " 미 보병 2사단 702 주지원대대 병장 출신 이라는것.  한국에서야 군필 한것이 기본이지만 외국 기업에서는 어느정도 대우를 받는다. 거기다 현장직의 경우 군필이 상당한 점수가 있고 이름도 낮선 아시아의 소국에서 미 육군 정규군으로 근무 한것이 그네들에게는 상당한 호감이 됬었다. 한국에 주둔해 있는 미군들의 작전 효율을 높이기 위해 상당수 한국에서 차출된 병사들이 같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아직도 전쟁 위험이 있는 한국의 최 전방에서 미 육군 소속, 거기다 최 정예 사단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현장직으로는 적격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온 506 공병 여단이 미 2사단 소속으로 한국에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별로없었다. 가끔 영화속에서 부대 휘장을 보면서 같이 훈련하고 작전뛴 기억이 나지만 이번 영화처럼 2사단이 주축이 된 영화는 거의 보지 못했다. 


일반 행정병과 달리  전투병과 2사단의 KATUSA는 미군들과 여러가지 작전을 직접 참가하는 최고 학력의 엘리트 부대라는 자부심이 있다.  작전중에 많이 보던 휘장들. 7기병 여단의 노란색 휘장의 사선이 그어지고 그리고 말 대가리(?) 



인디언 헤드. 미 2사단의 마크. 


28개월 군 생활에서 2년간 어깨 휘장에 달려 있던 녀석이다. 

예복에는 컬러지만 전투복에는 검은색으로 세겨져 있다. 2차 세계대전때 나치 잡는 인디언이라 끝발 좋았지만 한국전에서는 창피할 정도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베트남과 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영화는 많아도 한국전에 관한 영화가 별로 없고,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는 이유는, 미군 입장에서 딱히 자랑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의 게릴라전에 속수 무책으로 당했고. 한국전에서 미군을 상대 하는 방법을 그대로 베트남이 따라한것이 전투역사에서는 정설로 받아 들여 질 정도로. 미군과 연합군의 피해는 극심했었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한국 최 전방에 인계철선을 형성하고 있는 미 육군 최고의 정규 사단. 재대 말년에 터진 걸프전때문에 많은 화력과 병력이 재 배치되었기에 예전과 다르겠지만 무심코 보는 영화 속에서 낮익은 휘장과 군장들.  소 영웅주의의 영화가 아니라 사실과 기록을 기반으로한 영화 라는것. 미국에서 만든 영화 답게 위대하신 미국만 표기 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전사 통보를 택시 기사가 전달해주는것과. 북 베트남 정규군들의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조금 노력한 흔적들.  "전사한 병사들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전사 할 병사들을 위해" 산 정상에서 전사한 부대원을 위해 베트남 사령관의 짧은 기도를, 그의 아픔을. 민족의 독립을 위한 호치민과 노력한 수 많은 독립투사 들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네들 보다 조금더 잘 산다(?)고. 우리의 주장을 합리화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베트남을 자주 가게 되지만 항상 마음 한켠에는 이네들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있는것. 특히 한국군과 치열했던 곳에서는 가능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것. 조금이라도 이네들에게 다가 갈 수 있도록 조심 한다. 베트남 뿐만 아니라 다른 어디를 가든 가능한 그네들의 역사와 삶을 존중하려 노력 하는것. 방문 하기 전에 최소한 그네들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고 노력한다. 


  제대 기념으로 인디언 도끼를 선물 받았었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는 잊혀진 기억의 일부를 한편의 영화에서 과거 힘들고 즐거웠던 기억들.  만약 내가 영화의 한 장면속으로 들어간다면 나는 미군편에 섰을까? 아니면 북 베트남 편에 섰을까?. 예전에는 당연히 자유 라는 포장지를 좋아 했겠지만. 지금은 맘이 많이 기울여져 버렸다.   누구든. 힘이 있다고 남의 나라, 남의 민족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는 것을. 


자주 받는 질문. 


남과 북이 싸우게 된다는 당신은 어느쪽 ?


미국이 북한을 침공 한다면 당신은 어느쪽 ?


답은 정해져 있다. 그때 상황에 따라 결정하고. 그 결정을 후회 하지 않을꺼라는것을. 








[영화 줄거리 영화정보 사이트에서 퍼옴]

생사를 넘나드는 72시간의 전투! | 죽어서라도 우리는 함께 돌아갈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과의 전면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베트남의 지형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공수부대를 파견하여 헬기 공습 시험전을 펼친다. 그리고 이 시험 전투의 책임을 하버드 석사 출신의 전략가 할 무어 중령(멜 깁슨 분)에게 맡긴다. 그러나 임무 수행지인 아이드랑 계곡에 대한 사전 검토에 들어간 그는 이곳이 10여년 전, 프랑스 군인들이 몰살당했던 지역으로 일명 죽음의 협곡이라 불리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언제나 그랬듯 자기 생애 마지막 전투가 될 지도 모를 출전에 대비해 아내에게 유언장을 남기고 베트남으로 떠나는 무어 중령.


  1965년 11월14일 일요일 오전 10시 48분. 제7기갑부대 1 대대장을 맡은 무어 중령은 395명의 전투 경험 전무의 어린 부하들을 이끌고 아이드랑 계곡의 X-RAY 지역에 헬기 고공침투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지역을 점령한 월맹군이 모두 정예요원으로 아군보다 5배나 많다는 사실은 선발대가 모두 희생당한 뒤 알게 된다.

  1965년 11월 15일 월요일 오전 2시 30분. 오직 헬기를 통해서만 외부와 접촉이 가능한 험준한 협곡, 고통 속에 신음하는 부상자들마저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하나 둘 그 목숨을 잃어간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깊은 밤, 적진에 버려진 군인들에게 두려움이 엄습해오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이곳에서 모두 동지들에 대한 걱정으로 날이 밝을 때까지 잠을 이룰 수 없다. 한편, 전쟁 리포터로 전지에 들어온 조 갤러웨이(배리 페퍼 분)의 카메라에는 젊은 영혼들이 고통 속에 신음하는 모습들이 담겨지고, 그는 더 이상 카메라가 아닌 총을 들고, 민간인이 아닌 군인으로 전장을 뛰어다니게 된다.

  1965년 11월 16일 오후 4시 05분.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 월맹군은 공포에 빠진 미군들을 포위해 들어가자 본부에선 작전의 실패를 인정하고 본대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러나 부하들을 남겨두고 홀로 전장을 등질 수 없는 무어 중령은 최후의 수단으로 브로큰 애로우를 외친다. 곧바로 공군의 어마어마한 지상 폭격이 감행되고, 월맹군의 추격로는 봉쇄되지만, 무어 중령의 소대도 폭격의 화염에 희생된다. 아군이 아군을 죽이는 처참한 상황.그러나 전세는 조금씩 미군편에 유리해지기 시작하고.

  1965년 11월 17일 오전 1시 00분. 무어 중령은 월맹군 작전을 간파하고, 이를 교란 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고, 마지막 작전 지시를 내린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조차 장담하지 못하는 처참한 전쟁의 포화 속에서 무어 중령은 다시 한번 다짐한다. 이들이 살았건, 죽었건 내 뒤에는 아무도 홀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